책 읽어주는 남자

paran1109.egloos.com



위안이 됐던 만화책, <야마모토 귀 파주는 가게> + 그의 책읽기

지난 18일. 대학친구인 P의 문상을 다녀오던 길에 홍대에서 폴을 만났다. 떠오른 이름이 폴이었다. 가게에 잠시 들리겠다는 나의 말에 폴은 밖에서 보자고 했다. 약속 장소를 정한 곳은 홍대였다. 폴과 그의 여친 미스김, 그리고 내가 한 시절을 서성거렸던 곳이니까. 폴은 아무말없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그와 함께 홍대를 산책했다. 이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한 사람을 잃어버린 나의 모습은 설명되지 않았다. 커피빈에서 달달한 카라멜 마키야토 커피를 마셨고, '하카타분꼬'에서 국물이 진한 인라면을 먹었다. 폴은 출근을 위해 수원으로 가겠다던 나를 붙잡아 <커피 폴>로 데리고 가서 만델링 커피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날 폴을 만난 일이 위안이었다면, 그의 가게에서 우연히 마주친 아베 야로의 만화책 <야마모토의 귀 파주는 가게>가 적적한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귀 파주는 가게라니? 심야식당을 좋아했던 터라 익히 들어봤던 책이었다. 그의 여친 미스김이 좋아라는 작가이기도 했다. 커피를 마시면서 그 책을 천천히 읽었다. 귀 파주는 가게의 인상은 심미적이지만, 지극히 에로틱했다.

연애를 할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상대의 귀를 만지는 일이다. 귀는 듣는 일도 하지만, 촉감의 감각이 예만하게 느껴지는 신체기관이기도 하다. 그런 느낌이 이 책에서 동감했다고나 할까.  '긴머리 남자', '느끼지 못하는 여자', '동선동일기', '나비의 혀', '달인', '잠을 못자는 남자', '비를 부르는 여자', '귀여운 귀' 등의 단편들이 담겨있다. 귀 파주는 가게의 여주인장의 인상은 심야식당의 분위기처럼 운치있지는 않았다. 심야식당을 기대하고 봤다가는 약간을 실망을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사연이 담긴 손님들. 그들이 가게를 찾은 후에 고민 등이 쉽게 해결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귀를 파기 위해 그 가게를 찾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아베 야로 씨가 그리는 작품 세계는 소소하지만 따뜻한 것이 특징이다. 이 책에서도 같은 감흥을 느꼈던 듯하다. 귀 청소를 받고 나면 나도 그를 잊을 수 있을까.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의 목소리가 유난히 그립던 날이었다. 폴이 타 준 한 잔의 커피와 한 권의 만화책. 봄날 같은 날씨가 이어졌던 그날의 기록이다.





갤러리 환타의 봄 + 그의 픽션


당신은 여름을 좋아한다. 그러나 당신 소설에선 여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당신의 친구 S가 그랬던가. "네 소설에서는 여름이 존재하지 않아. 그래서 쓸쓸해." 당신은 가을이 배경인 소설을 늘 쓴다. 아니 겨울이 배경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갤러리 환타1)에 가려고 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여름을 보낸다. S가 당신에게 쓸쓸한 봄에 갤러리 환타에는 왜 갈거냐고 물었을 때, 당신은 쓴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이 대답이었지.

갤러리 환타는 이 도시 외곽에 있는 낡은 호텔이다. 10년 전만해도 여름이면 많은 이들이 찾아와 지내다 가곤했던 곳이다. 그러나 이제는 市의 재개발 구역으로 묶인 외곽지대에 있어 아무도 그곳을 찾지 않는다. 종종 가난한 이방인들이 남루한 기억처럼 묵다 갈 뿐이다. 당신은 며칠 전 조간신문에서 소설가 '핑'의 신간 '갤러리 환타의 봄'이 출간됐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가 6개월동안 머물며 글을 쓰던 곳이라고 나와 있었다. 당신은 생각했다. 그곳에 가서 핑의 소설을 읽다 오겠다고.

그러고보니 당신도 소설을 쓴다. 대학시절에 인문학부의 창작수업 몇 개를 들은 게 전부였지만, 가끔 뭔가를 쓰곤 했다. 당신은 전공인 통신공학보다는 창작수업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후 당신은 이름없는 잡지로 등단한 적이 있다. 그게 벌써 5년 전이다. 그리고 잊었던 일이다.

당신은 가끔 뭔가를 써서 S에게 보여준다. S는 당신에게 말한다. 니 소설에는 분위기만 있어, 근데 그게 참 맘에 들어, 마치 비내리는 봄날 오후에 먹는 국수처럼.

당신은 수첩을 꺼내든다. 사진을 꺼낸다. 오래 전 갤러리 환타에서 여름을 보냈던 사진이다. 사진 속에는 당신과 한 여자가 갤러리 환타를 배경으로 다정히 서 있다. 당신은 손등으로 눈가를 훔친다. 그리고 담배를 입에 문다. 당신은 폐속 깊숙이 담배연기를 빨아들렸다가 천천히 내뱉는다. 갤러리 환타에 그녀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은 사진을 찢어버린다.

당신은 핑의 소설을 좋아한다. 당신은 핑을 만난 적이 있다.
갤러리 환타에서였던 것 같다. 재개발구역의 갤러리 환타는 조만간 사라질 거라고 누군가 그랬다. 그곳에는 오피스텔 타운이 들어설거라고 시 관계자가 이야기한 적도 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떠난 여자의 이야기만 쓴다. 갤러리 환타에서 만나 사랑을 나눴던 여자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을 알고 있다. 그녀를 다시 만난다면 이제 갤러리 환타 같은데서 사랑을 나누고 싶지 않다고. 갤러리 환타 너머에는 오래된 성문이 있다. 이 도시는 오래 전에 성이 있던 도시다. 도시의 외곽 남쪽과 북쪽에 성문이 존재한다. 가끔 당신은 그곳을 산책한다. 남문과 북문 사이에 갤러리 환타가 존재한다. 여자는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중 '밤인사'라는 노래를 좋아했다. 여자는 종종 그 노래를 흥얼거렸다.

당신이 여자에게 빠져 있는동안, 여자는 그 노래처럼 갑자기 사라져갔다. 당신의 방문에 '잘자요'라는 인삿말이 적힌 쪽지를 남기고 떠났다. 당신은 여자의 호출기 음성 사서함에 간절한 목소리를 꽉꽉 채웠고, 당신의 호출기 번호를 여러번 남겼다. 여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가 떠난 이유를 당신을 몰랐다.

갤러리 환타. 당신은 입엣말로 웅얼거린다. 그곳에 가서 당신도 소설가 핑처럼 소설을 쓰려고 생각한다. 소설이 끝나고 나면 여자도 잊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서랍을 뒤져 오래전에 여자와 함께 듣던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가 녹음한 겨울나그네 카세트 테이프을 꺼내든다. 먼지가 묻은 테이프 케이스의 겉면을 문질러본다. 당신의 손안에 먼지가 그득 묻어난다. 당신은 카세트 플레이어에 테이프를 꽂고 앞으로 돌려 그 노래를 듣는다. 테이프 A면 첫번 째 곡이다.

당신은 노래를 들으며 이스트팩에 짐을 싼다. 갤러리 환타서 봄을 지내려고. 워크맨과 mp3 플레이어도 챙겨넣는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느껴진다. 셔츠와 편한 면바지를 챙기고 여벌의 양말과 속옷을 담는다. 그리고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도 챙긴다.

갤러리 환타에 가면, 갤러리 환타에 가면 정말로 소설이 나올까. 소설을 다 쓰고 나면 또다른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당신은 흰 종이처럼 웃는다. 갤러리 환타에 전화하는 일만 남았다. 당분간 일을 쉬기로 한다. 아차, 당신은 여름을 좋아한다. 갤러리 환타에서 봄을 나며 여름이야기를 쓸 것이다. 당신은 S에게 전화를 건다. S의 목소리가 들린다. "갤러리 환타에..."

당신이 오랫동안 전화통화하는 모습이 보인다. 당신이 서 있는 배경으로 창이 있고,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당신은 고개를 돌리다 눈가를 오래오래 쓰다듬는다. 그 손으로 다시 이마를 짚는다. 눈이 제법 내릴 것 같은 날이다. 당신은 길게 한숨을 쉰다. 갤러리 환타는 조만간 헐릴 것이다. 당신은 아이처럼 웃으면 눈이 내리는 밖을 응시한다. 세상은 지도처럼 그려진다. 지도 위에 눈이 소복히 덮인다.


- 2006년 3월 作.

1)갤러리 환타 : 배수아 씨의 단편소설 <갤러리 환타에서의 마지막 여름>에서 따옴.








소설가 한유주, 세 번째 소설집 펴내 + 그의 관심(작가들)

한국일보 문학상 수상작가인 소설가 한유주 씨가 최근 세 번째 소설집 <나의 왼손은 왕, 나의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문학과지성사 刊)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번 소설집에는 '나는 필경'을 비롯해 '농담', '머리에 총을', '자연사 박물관' , '돼지가 거미를 만나지 않다', '도둑맞을 편지', '인력입니까, 척력입니까', '인력이거나, 척력이거나', '불가능한 동화' 등 9편이 담겼다.

한 씨는 이번 소설집을 통해 말하고자 하나 결코 의미에 가닿을 수 없는 언어, 쓰고자 하나 결코 그 의도에 가닿을 수 없는 글쓰기의 본질을 파고드는 집요한 의문들을 담았다.

문학평론가 강동호 씨는 추천글을 통해 "(이번 소설집은) 소설이 무엇인지에 대해 기꺼이 고민해보려는 독자들에게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그 물음의 글쓰기’"가 될 것이라며 "소설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앎이 끊임없이 무너지고 샘솟으려는 기미로 충만한 자리였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한 씨는 서울에서 태어나 <문학과사회>로 등단했으며, 펴낸 책으로는 소설집 <달로>, <얼음의 책> 등이 있다. 2009년 제43회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했다.

/책 읽어주는 남자, 지노 paran1109@




1 2 3 4 5 6 7 8 9 10 다음